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숭례문 방화 사건 (문단 편집) === 숭례문 괴담 === 숭례문 붕괴 이후 [[조선]]의 [[정도전]]이 '''"숭례문이 전소하면 도읍과 나라의 운이 다한 것이니 멀리 피난을 가야 한다."'''는 말을 실록에 남겼다는 풍수 [[괴담]]이 돌아 사회 분위기를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는데 [[디시인사이드]]의 모 회원이 '''창작임을 밝히고''' 만든 [[짤방]]이 와전되어 퍼진 소문이다. 일단 정도전의 생전 정치적·철학적 성향에 비추어 보면 '''저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정도전은 철저한 현실주의 개혁가이며 풍수지리나 음양도 같은 미신과 괴력난신을 극혐하여 유학 이외의 가르침은 일체 배격했으며 당연히 [[풍수지리|땅의 기운이 어떻다느니 하는 얘기]]도 전혀 믿지 않았다. [[태조(조선)|태조]] 임금이 도읍을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재상들의 의견을 물었을 때에는 "신은 음양술수 그런 거 모릅니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살펴봐도 천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나라를 다스리는 건 땅이 아니라 사람에게 달린 것입니다. 지기의 성쇠 어쩌고 하는 건 자기들이 생각이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옛날 사람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겁니다. 술수하는 자 말고 선비의 말을 들어 헤아리십시오."라는 상소를 올려서 도읍을 옮기는 데 회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로부터 유가에서는 '자불어 [[괴력난신]]'에 입각해 성명학, 풍수지리, 사주팔자 등을 잡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게다가 꼬장꼬장한 성정에 일종의 근본주의자였던 정도전이라면 더더욱. 물론 조선시대에도 기실 이런 잡학들이 유행했고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정도전과 동년배 유학자들만 봐도 하륜은 잡학에 두루두루 능통한 편이었고 조준 또한 무인정사 당시에 집에서 점을 치면서 사태를 관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천도가 결정되자 정도전은 도시 설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풍수상으로 숭례문이 광화문의 해태상과 숭례문 옆에 있었던 남지라는 연못[* [[서울역]] 인근 서울스퀘어 터에 있었다.]과 함께 경복궁의 화기를 막는 비보수단으로 만들어졌고 숭례문의 현판이 세로인 것도 관악산의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309635|화기를 막기 위해서라는 게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남지는 도시계획으로 없어지고 해태상은 광화문 복원 작업으로 치우면서 숭례문까지 없어져서 관악산의 화기가 [[청와대]]로 바로 간다는 소리가 나오기는 했다. 여기서 화기(火氣)는 단순히 불의 기운이 아니라 전쟁이나 재앙과 같은 살(煞)을 의미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풍수고 뭐고 [[조선 왕조]] 시기에 도읍의 '''정문'''인 숭례문이 전소할 정도면 적성세력이 이미 도읍에 진입했을 상황이니 (아니면 [[런던 대화재]] 쌈싸먹는 재해가 벌어졌다든가) 멀리 피난을 가는게 정답이다. 즉, 괴담의 허구와 진실은 둘째치고 저 말의 의미 자체는 틀린 건 아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조선 왕조 시기에만 해당되는 말인 데다 설사 조선 왕조 시기라고 해도 당연한 소리를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시점에서 역시 실제로 말했을 가능성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